-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자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 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 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 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나는 펜촉으로 긁적댐으로써 내 꿈을 이 세상에 단단히 붙잡아 매 놓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책과 보랏빛 잉크 한 병을 얻어 가지고 공책 겉장에 '소설 노트'라고 적어 넣었다.
최초로 완결한 소설에 나는 '나비를 찾아서 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한 학자와 그의 딸과 건장한 젊은 탐험가가 희귀한 나비를 찾아서 아마존 강을 따라 올라가는 이야기였다.
줄거리도 인물도 모험의 내용도 그리고 제목조차도 모두 지난 계절에 나온 그림 이야기책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의도적인 표절을 하고 나니 나는 마지막 불안까지도 깨끗이 씻어 낼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아무것도 꾸며 내지 않았으니 그 모두가 진실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책을 출판할 욕심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인쇄해 놓아도 좋도록 준비해 두기는 했다.
그래서 원본과 어긋나는 이야기는 한 줄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154p
-현실이 아니라 상상을, 사물이 아니라 말을, 생활이 아니라 허구를 섬긴 이 야릇한 병,
30년이 걸려서 이제 겨우 벗어났다는 이 정신병을 우리는 편의상 '문학병'이라고 불러 두자. 27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