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유리잔에 스카치위스키를 따라 온더록스로 한두 잔 마셨다. 그러다보면 점점 졸음이 쏟아져 대개 열시쯤 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깊게 자는 편이라 한번 잠들면 다음날 아침까지 거의 깨지 않았다.
아침이나 해질녘, 별달리 할일이 없는 시간에는 마을 주변을 정처 없이 산책했다.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물소리가 들리는 강변길 코스가 마음에 들었다.
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가끔 조깅하거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스쳐 지났다.
하류를 향해 몇 킬로미터 내려가면 포장된 길이 갑자 기 뚝 끊기고 강에서 벗어나 넓은 풀숲으로 이어진다.
아랑곳 않고 그대로 계속 나아가자 얼마 안 가-대략 십 분쯤 걸으면-그 좁은 산길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막다른 초원 한 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초록빛 잡초가 높이 자라 있고, 주위 는 적막하다.
귓속에서 침묵이 울린다. 고추잠자리 무리가 주위를 소리도 없이 날아다닐 뿐이다. 올려다보니 하늘은 새파랗게 개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단단 한 흰구름이 이야기에 삽입된 몇 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억센 풀냄새가 났다. 그곳은 다름 아닌 풀의 왕국이고,
나는 그 풀들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무례한 침입자였다. 280p
-그러다 문득-마치 발밑의 풀숲에서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 는 것처럼 -그 제목을 생각해냈다.
역 근처 커피숍에서 흘러나 오던 콜 포터의 스탠더드 넘버 제목을. Just One of Those Things (흔히 있는 일이지만)>다.
그리고 그 멜로디가 의식의 벽에 들러붙은 주문처럼 귀 안쪽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머리맡의 전자시계는 열한시 반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자려고 애쓰기를 그만두고 이불에서 나와 잠옷 위에 카디전을 걸쳤다.
가스 스토브를 켜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작은 냄 비에 데워 마셨다. 생강 쿠키를 몇 개 먹었다.
그리고 안락의 자에 앉아 읽다 만 책을 펼쳤다. 434p
-나는 마음을 바꾸고 잠옷을 벗고서 최대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두툼한 스웨터 위에 더플코트를 입고,
캐시미어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스키용 털모자를 쓰고, 라이닝을 댄 장 갑을 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오지도 않는 잠을 기다리는 건, 거의 오 분 간격으로 시곗바늘을 쳐다보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그럴 바에야 추운 바깥을 정처 없이 걷는 편이 나았다. 밖으로 나와보니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낮의 온화하고 따스한 기운이 사라지고, 하늘은 두꺼운 구물이 뒤 덮고 있었다. 달도 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띄엄띄엄 서 있 는 가로등이 인적 없는 길을 싸늘하게 비출 뿐이다.
산에서 볼 규칙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파리를 떨어뜨린 나뭇가지 사이 를 소리 내며 빠져나갔다.
차갑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다. 언 제 갑자기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얀 입김을 뱉으면서 강변길을 무작정 걸었다. 무거운 눈 신에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울렸다.
강이 반쯤 얼음에 덮여 있어도 물소리는 또렷하게 귀에 와닿았다.
매섭도록 추운 밤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냉기는 내 몸을 안쪽부터 조이고 쥐어짜며,
머릿속을 부용지 채웠던 생각을 잠시나마 마비시켰다. 찬바람에 찔끔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덕분에 조금 전까지
귓속에서 울리던 종잡을 수 없는 멜로디는 말끔히 사라졌다. 북쪽 지방의 겨울이 지닌 미덕이라고 해야 할까.
걸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 그저 기분좋은 공백이었다. 혹은 무였다.
눈의 예감을 품은 싸늘함이 무쇠팔처럼 내 의식을 호되게 추궁하고 지배했다.
춥다는 것 말고 다른 감각이 파고들 틈은 눈곱만큼도 없다. 435p
-집으로 돌아와 우선 쌓여 있던 일주일 치 빨래를 해치웠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욕실을 깨끗하 게 닦았다. 유리창을 닦고 침대를 말끔히 정돈했다. 빨래가 끝 나자 정원 건조대에 널었다.
그리고 FM 라디오로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셔츠 몇 장과 시트를 다림질했 다.
시트를 다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 다림질을 마치고 장바구니를 챙겨 장을 보러 갔다.
마트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재료를 손질했다. 채소를 씻어 소분하고,
고기와 생선을 랩으로 다시 싸서 냉동해야 하는 건 냉동실에 넣었다.
닭 뼈를 우려 육수를 만들고 호 박과 당근을 삶았다.
그렇게 하나하나 집안일을 해나가면서 조금씩 평소의 자신을 되찾아갔다. 62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