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둘이서 도쿄 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비탈길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철로를 가로질러 무작정 걸었다.
어디를 가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걸을 수만 있으면 됐다.
마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종교 의식처럼 우리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걸었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받쳐 들고 걸었다. 가을이 오고 기숙사 정원은 느티나무 잎으로 덮였다.
스웨터를 입으니 새로운 계절 냄새가 났다. 나는 신발 한 켤레를 닳아 없애고 스웨이드 구두를 새로 샀다. 52p
-당연히 이 야기가 통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었다.
하나를 잡으면 몇 번이나 거듭 읽었고, 때로 눈을 감고 책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책 향기를 맡고 페이지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57p
-나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치즈버거를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술기운을 뺀 다음 근처 재상영 극장에서 「졸업」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그냥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와 새벽 4시의 서늘한 신주쿠 거리를 생각에 잠긴 채 무작정 걸었다.
걷기에도 지치자 나는 24시간 커피숍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첫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나처럼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145p
-짙게 고요가 내려앉은 깊은 밤 나는 부엌에서 꽤 즐거운 마음으로 한 행 한 행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선반에 놓인 브랜디를 꺼내 커피 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브랜디가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3시 전에 살짝 미도리를 살피러 갔더니 그녀는 많이 피곤 했던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나는 부엌으로 돌아와 브랜디를 한 잔 더 마시고 다시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어 내려갔다.
책을 다 읽었을 때 하늘이 조금 밝아 오기 시작했다.
나는 물을 끓여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에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
"브랜디를 조금 마셨어. 『수레바퀴 아래서」를 샀고, 날이 밝아 이제 돌아가. 안녕."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잠든 네 모습이 정말 예뻐."라고 덧붙였다.
그다음 나는 커피 잔을 씻고 부엌 전등을 끄고 계단을 내려가 조용히 셔터를 올린 다음 바깥으로 나왔다.
이웃 사람이 보면 수상쩍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 6시 전이라서 아직 길을 가는 사람은 없었다.
까마귀가 지붕에 앉아 주위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나는 미도리 방에 걸린 옅은 핑크빛 커튼을 슬쩍 올려보다가 전철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종점에서 내려 기숙사까지 걸었다.
아침을 파는 정식집에 들어가 따뜻한 밥과 된장국과 채소 절임과 달걀 프라이를 먹었다.
그리고 기숙사 뒤편으로 돌아들어 1층 나가사와의 방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가사와는 창을 열어 주었고, 나는 그곳을 통해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피라도 한잔할래?' 그가 물었지만, 거절했다.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물러나 이를 닦고 바지를 벗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꼭 감았다. 이윽고 꿈도 없는, 무거운 납으로 된 문같은 잠이 내려왔다. 39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