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갈까요? 저는 미술관에는 한 시간 이상 있지 않는답니다.
사람의 감상력이 지속될 수 있는 한계가 한 시간쯤 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중에 와서 마저 보기로 하지요." 41p
-"그런데 왜 취직을 안 하겠다는 거야?"
"왜냐고? 난 돈에 관심이 없어." 이사벨은 웃었다.
"래리,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사람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어."
"난 조금은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만큼은 있다구."
"빈둥거리는 거?"
"그래."
그는 미소를 지었다.
래리, 서로 힘들어지게 정말 왜 그래 이사벨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지 않고 싶어.“
“그러지 않을 수 있잖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 로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한 말은 그 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죽은 사람은,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보여." 82p
-나는 다음 날 오전을 무척 즐겁게 보냈다. 먼저 뤽상부르 공원에 가서 한 시간쯤 그림을 감상하다가,
공원 여기저기를 한가롭게 거닐면서 젊은 시절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에 관해 열심히 토론하며 둘 씩 짝을 지어 자갈길을 걸어가는 학생들도,
보모들이 지켜보 는 앞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도, 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자리에 앉아 조간신문을 읽는 노인들도 모두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서 식료품 가격이나 하인들의 잘못된 행실에 관해 수다를 떠는 중년 과부들도 그대로였다. 그 다음에 나는 오데옹 거리에서 새로 나온 책들을 구경했다.
까다로운 점원의 눈을 피하려고 애쓰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 가난한 젊은이들을 보니 꼭 30년 전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서점에서 나온 후에 초라하지만 친근 함이 느껴지는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몽파르 나스 거리의 돔 앞에 이르렀다.
래리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한잔하고 나서, 옥외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97p
-"파리에 와서 줄곧 뭘 하며 지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책을 좀 많이 읽었어. 하루에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쯤. 소르본 대학에서 하는 강의도 들었고. 프랑스 문학에서 중요한 작품들은 전부 읽은 거 같아.
라틴어도 읽을 줄 알아. 적어도 산문은 말이야. 라틴어도 불어만큼은 쉽게 읽게 됐어. 물론 그리스어는 더 어렵지. 하지만 좋은 선생님한테 배우고 있어.
당신이 파리에 오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세 번씩 저녁마다 배우러 다녔어."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하려고 그래?"
"지식을 얻는거지." 그는 미소를 지었다.
"현실적으로 별로 쓸모없는 것들 같은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어. 오디세이아를 원문으로 읽는다는게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몰라.
뭐랄까, 발끝으로 서서 손을 한껏 뻗으면 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는 흥분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지난 한두 달간은 스피노자를 읽었어, 아직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굉장히 흥미로웠어. 산악 지대에 있는 드넓은 고원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내려선 기분이야.
마치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것처럼 고독감과 맑은 공기에 취하지. 정말 흥분되고 행복한 기분에 젖게 돼“ 116p
-츠빙겐베르크까지는 20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어서 거기 도착했을 무렵에는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쯤이었어요.
그날, 그때 걷던 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제 발자국 소리와 이따금 농가에서 들리는 수탉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레한 회색빛이 대기에 맴돌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먼동이 트고 해가 솟아오르자,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싱싱한 푸른색이 넘치는 들판과 숲들과 밀밭이 상쾌한 아침 햇빛 속에서 빛났어요. 저는 츠빙겐베르크에서 커피 한 잔과 롤빵을 먹었어요. 192p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347p
-그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움푹 팬 두 뺨을 타고 굵은 눈 물이 흘러내렸다.
"미국을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이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몹시 서글퍼졌다.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애처로웠다. 380p
-나는 침대로 가서 등대의 불빛 에 의지하여 엘리엇의 맥박을 확인했다.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침대 옆의 램프를 켜고 그를 보았다.
턱이 축 처져 있었다. 미처 감지 못한 눈을 감겨 주려다가 잠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울컥했다. 뺨을 타고 눈물 몇 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다정했던 옛 친구. 그의 인생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고 보잘 것 없었는지를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수많은 파티에 참석 하면서 그 모든 공작, 백작들과 허물없이 지냈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를 잊었으니까. 398p
-나 역시 의대 시절에 죽은 사람들을 여러 번 봤으며, 전쟁 때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목격했다.
그때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하찮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위엄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흥행사가 갖다 버린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그날 밤, 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울음이 나왔죠. 저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화가 나더군요.
제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부당함이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저는 고국으로 돌아왔죠. 어릴 때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항공 관련 일을 못 하게 되면 자동차 공장에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부상 중이라 한동안은 쉴 수밖에 없었죠.
다 낫고 나니까 일자리가 들어오더군요.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하찮게 느겨졌거든요.
그땐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문했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어차피 내가 살아 돌아온 건 단지 운이 좋아서였잖아요.
그래서 제 삶을 십분 활용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그 전까지 저는 신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제가 아주 무지하다는 건 알았지만,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몰랐어요. 배움을 얻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죠. 41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