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나는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었기 때문에 목이 좀 아팠다.
나는 내려가서 빵과 파스타를 좀 사 왔고, 음식을 만들어 선 채로 먹었다. 창가에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 했으나,
공기가 선선해져서 좀 추웠다. 나는 창문을 닫았고, 방 안으로 돌아오다가 거울 속에 알코올램프와
빵 조각이 함께 놓여 있는 테이블 한끝이 비친 것을 보았다. 나는, 언제나 다름없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가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37p
-내가 한 일은 옆자리에 앉아서 몇 마 디 말을 나누거나, 웃거나, 내려서 조금 건거나 했던 것이 전부였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그 정도를 가지고 벅차다고 말할 여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피곤했다. 앞으로 영화에 저녁식사까지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을 이 남자와 더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무 데서나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 남자와 같이 지낼 앞으로의 네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이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었다.
설령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의 시간들이 백지 상태로 놓여 있다면 그만큼 더 흥미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76p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해보았다. 김장웁니다. 안진진과 일요일을 함께 보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쓸쓸하게 남도로 떠납니다. 쓸쓸함이 가시면 돌아오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한 김장우의 전화 메시지 때문에 나는 쉽게 하늘색 전화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동전은 넘치도록 많은데, 뒤에서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조용조용 꽃가지를 흔들고 있는 라일락은 저리도 아름다운데,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이 라일락 향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기만 한데··•···.79p